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클랜드 제도 (문단 편집) == 역사 ==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먼저 발견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당시 남미 동부 지역은 원주민 사회였던 만큼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 상륙했다고 보고 있고 영국도 존 데이비스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보고 있지만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최초로 섬을 조사한 내용으로는 네덜란드의 세발트 데 베르트(Sebald de Weert)가 1600년에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륙하지는 않았다. 최초의 상륙자는 17세기 영국 탐험대인데 이것은 기록이 있다. 바로 이들에 의해 현재의 포클랜드 제도라는 지명이 붙었다.[* 포클랜드는 당시 영국 해군 제독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잠깐 상륙하고 돌아간 것을 영유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최초의 사건은 [[프랑스인]]들이 1764년 동 포클랜드 섬에 정착하여 루이 요새를 세운 것이다. 1766년 [[영국]]이 손더스 섬에 기지를 세웠다. 이때 양측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가 주장하는 명칭인 '말비나스' (Malvinas)는 이 프랑스인들의 정착에서 비롯한다. 포클랜드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생 말로 출신이어서 이를 뜻하는 말루인 섬(Ile Malouines)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스페인어로 번역한 이름이 '말비나스'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1766년 포클랜드 제도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고 [[스페인]]에게 영유권을 팔았다. 4년 뒤 앞서 세운 영국의 기지를 발견한 스페인인이 침공해서 점령했으나 다음해 영국에 반환했다. 그러나 영국은 영유권을 표시하는 명판을 남겨둔 채 다시 철수했다. 그 후 스페인 정부 당국은 죄수 캠프로 쓰다가 역시 중도에 철수해서 무인도가 되었다. 한편 유럽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난 동안 모국의 혼란을 틈타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아르헨티나는 이 영토도 같이 승계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포클랜드 제도에는 유럽인들이 모두 철수해 무인도가 된 지 40년이 지난 뒤였다. 4년 뒤 아르헨티나는 이 지역이 자신의 영토라고 선포하고 미국인 사략선장을 파견했는데 여전히 무인도로 남겨두었다. 1823년 아르헨티나가 독일인 상인을 보내 기지를 설치했지만 그의 불법적인 어선 나포와 해적 행위에 분노한 미국 정부가 함선을 보내 파괴했다. 그러자 포클랜드 제도에서의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들은 [[영국]]이 함선을 보내 섬을 점령했다. 이후 영국의 통치를 받았고 영국은 다수의 이주민을 보내어 정착시키고 자국 영토로 삼았다. 고래와 바다표범을 잡거나 목축업 등을 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태평양]]에서 쫓겨온 [[독일 해군]] 아시아 분함대가 이 주변을 지나다가 [[영국 해군]]에게 발각당해 전멸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포클랜드 해전]].[* 정확히는 독일의 세력권이던 산동성 청도에 배치된 독일 함대(장갑순양함 2척, 경순양함 5척)가 영국과 동맹이던 일본 해군(순양전함 공고까지 보유한)을 피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영국의 세력권이 줄지어 있던 서쪽(말레이반도-인도-수에즈운하/남아프리카)을 피해 태평양 동쪽으로 항해하다 페루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고 중립국인 페루 항구에 입항해 잠시 휴식한 뒤 남미 최남단을 돌아 남대서양에 진입했으나 포클랜드 제도에 구식전함 1척만 있는줄 알고 공격했다가 페루 앞바다 해전의 패배에 열받은 영국이 급히 파견한 인빈시블급 순양전함 2척이 와 있었기에 박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열강 국가들이 식민지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지고 탈 식민지화 추세가 나타나자 [[아르헨티나]]는 약 1세기만에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포클랜드 제도의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영국에서 이주해온 영국인 이주민들과 그 후손들이었기에 이들 지역 주민들은 아르헨티나로의 귀속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이 현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영국군에게 패배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2013년 포클랜드 제도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치뤄진 주민 투표에서 포클랜드 제도 주민들 대다수가 영국령 잔류를 선택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양국 간에 이 일대를 둘러싸고 1960, 7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영유권 협상이 있었으나 영국 측의 거부와 지역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반대 여론으로 인해 모두 결렬되었고[* 영국 정부 내에서는 [[영국병|좋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뽑아먹을 건 없고 나가는 돈은 많은(...) 포클랜드를 아르헨티나에 매각하거나, 아르헨티나에 영유권을 넘겨주고 [[영국령 홍콩|홍콩]]처럼 99년 조차하는 것도 생각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수행하던 [[마거릿 대처|대처]] 내각도 처음에는 영유권 양도 후 조차를 고려한 바 있는데, 포클랜드 주민들과 본국 여론의 극딜을 맞고 백지화되었다.], 크고 작은 이유와 정치적 목적으로 결국 1982년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정권에 의해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유사시 전쟁을 예상치 못해 포클랜드 제도에 군 병력을 거의 주둔시키지 않아 당시 주둔병력이라고는 해병대 100여명이 전부였지만 곧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치열한 전투 끝에 아르헨티나군을 격파하고 결국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했다. 현재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의 영토로 자리잡고 있고, [[해외 주둔 영국군|주둔 영국군]]만 1,300명이 넘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